남아프리카 대륙에선 에이즈가 두통만큼이나 흔한 질병이다. 10명에 1명은 에이즈 바이러스와 더불어 산다. 어린 아이들로 눈을 돌리면 사정은 더욱 참혹하다. 이곳 대륙 아이들 감염 비율은 높게는 30%까지 치솟는다.
남아프리카 정부는 2004년부터 안티 레트로바이러스 치료제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허나
넓은 땅과 열악한 통신·교통시설은 치료제 보급을 가로막았다. 에이즈 환자들은 대개 외진 교외에 살았다. 먼 길 걸어 병원에
왔다가도 치료제가 다 떨어져 그대로 발길을 돌리는 환자들도 많았다.
어떡하면 효과적으로 환자 상태를 모니터링하며 적절한 치료를 제공할 수 있을까. 묘책은 휴대폰에서 발견했다.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 있는 비정부기구(NGO) 셀라이프(Cell-Life)는 ‘애프터케어’ 프로그램을 고안했다. 공공 의료 시스템과 휴대폰을 연계해 에이즈 환자들이 집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자원봉사자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자원봉사자 1명당 15~20명의 환자를 맡아 일대일 진료를 맡기로 했다.
이런 식이다. 자원봉사자들은 휴대폰으로 환자 건강상태나 약효 등을 기록한 다음
문자메시지로 셀라이프 중앙 데이터베이스로 전송한다. 전문 의료진은 웹사이트에 접속해 이 데이터를 분석하고 처방을 내린다. 열악한
공공 의료 시스템을 온·오프라인과 모바일 환경으로 넘어선 것이다. 유니세프는 셀라이프 ‘애프터케어’ 프로젝트를 “휴대폰 기술과
에이즈 관리를 결합한 가장 이상적인 사례”라고 추켜세웠다.
기술은 이를테면 주인 없는 칼이다. 칼자루를 쥔 자가 정육점 주인이냐 강도냐에 따라
결과는 천양지차다. 모바일 기술도 마찬가지다. 개인 정보를 몰래 훔쳐내는 데 쓰일 수도, 위급 상황에 처한 환자를 구하는 데
쓰일 수도 있다. ‘누가 칼자루를 쥐느냐’는 중요한 문제다.
<사회 변화를 위한 모바일 기술: NGO의 모바일 사용 트렌드>(Wireless Technology for Social Change: Trends in Mobile Use by NGO) 보고서는 모바일 기술을 다루는 검객으로 NGO에 주목했다.
UN재단과 보다폰 그룹 재단이 손잡고 만든 이 보고서는 모바일 기술이 어떤 식으로
NGO들을 거쳐 널리 이롭게 쓰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복잡하고 어려운 기술 설명도, 장황한 이론도 없다. 지면 대부분은 지구촌
곳곳에서 실제로 NGO들이 휴대폰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데 할애했다.
“전세계에서 35억대 이상의 휴대폰이 쓰이고 있으며 주요
기구들은 인도주의적 변화를 이끌어내도록 돕는 데 이 기술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티모시 워스 UN재단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 통신 기술은, 그리고 이 통신기술을 창의적으로 쓰는 일은 삶을 바꾸고 UN이 세계 곳곳의 가장 큰 도전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힘을 지녔습니다. 통신기술은 재난으로 헤어진 가족들을 이어주고, 위급 상황에 처한 근로자가 더 빨리 도움을 청하도록
도우며, 건강한 근로자가 질병이나 전염병으로부터 건강을 지키는 데 유용한 데이터를 제공합니다. 또한 기후변화의 영향을 추적하거나
심지어는 문명 충돌을 해소하는 것도 통신 기술의 몫입니다.”
이 보고서는 공공 보건, 국제 구호, 환경보호 등 3개 부문 11가지 사례를 통해 ‘모바일 시민행동’의 주요 경향을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부문별 사례는 다음과 같다.
국제 보건
1. HIV/AIDS 환자 치료(남아프리카)
2. 건강 클리닉과 원격진료 환자 연결(우간다)
3. 공공 건강 데이터 접속 장벽 낮추기(케냐, 잠비아)
4. 청소년 대상 성 건강 정보 제공(미국)
국제 구호
5. 이라크 난민을 위한 식량 원조(시리아)
6. 에너지 상황에 대한 의사소통 촉진(페루, 인도네시아)
7. 폭력 방지 도구로서의 문자 메시징(케냐)
환경보호
8. 산림보호를 위한 문자 메시징(아르헨티나)
9. 문자메시지를 활용한 설문조사 ‘인포라인'(남아프리카, 영국)
10. 휴대폰을 이용한 환경 모니터링(가나)
11. 야생 보호와 웰빙(케냐)
보고서는 또 전세계 NGO들이 모바일 기술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고 있는지도 보여준다. 이
조사에 따르면 일반 이용자들처럼 NGO들도 음성통화와 문자메시지를 가장 많이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이나 동영상(39%),
데이터 수집 및 전송(28%), 멀티미디어 메시징(27%) 등 다른 용도로 쓰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일부 NGO
활동가들은 데이터 분석(8%), 목록 관리(8%), 지도 서비스(10%)처럼 전문적인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데이터 관련
서비스는 특히 의료 및 보건관련 서비스에 종사하는 NGO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보고서에 소개된 NGO들은 전문 검객이 아니란 사실! 이들은 그저
주위에 널린 칼로 먹거리를 다듬고 환부를 도려내는 데 썼을 뿐이다. 어딘가에선 가벼운 안부를 실어나르는 휴대폰 문자메시지가,
다른 대륙에선 생명을 구하는 소중한 연락망이 되기도 한다. 새털같은 모바일 기술이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