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광장형 홈페이지가 성공한다.
성공했던 홈페이지들을 떠올려보자. 안티닉스 사이트, 두발제한반대사이트, 노사모사이트 등등. 공통점을 찾아보면 ‘광장성’이 매우 강하다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廣場이 무엇인가? 도심에 존재하는 공공적인 공간인 광장은 시민들의 생활의 중심지이자 정치, 상업, 사교 등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공간이다. 광장성이 강한 홈페이지의 특징은 누구든지 제한 없이 모여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토론하고, 싸우고, 결정하는 ‘공공의 場’을
제공하는 것을 우선시한다는 점이다.
광장은 철저히 개방적인 구조를 지향한다. 그러나 그동안 시민단체의 홈페이지는 폐쇄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폐쇄적인 구조일 뿐더러 홈페이지 편집자 1인에 의해 혹은 자동프로그램에 의해 모든 컨텐츠의 선택과 배열, 유통이 정리되었던 구조였다. 쌍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한다는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만들어놓은 우리는 인터넷의 진정한 장점을 살리지 못한 채 웹담당자의 역할을 온라인 잡지 편집자로
만들어버렸다. 네티즌들은 단지 구독자일 뿐이었다.
이야기를 하러 온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으라고 하면?
민주노총에서 정보통신부장으로 일했던 최세진씨는 “여중생 사건 광화문 집회를
보면서”라는 글에서 범대위와 네티즌들간의 갈등 양상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촛불시위에 나온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광장’이라는 공공의 장이었다. 그들은 같이 모인 사람들과 소통하고 호흡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누군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기획되는 집회가 아닌 소수의 사람들이 이곳저곳에 모여 서로 이야기하는 광장이
필요했는데 범대위는 그 넓은 광화문 거리에 선을 그어놓고 그 선 안에 앉아서 이야기 좀 들어보라고 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으라는
것인가. 사람들을 만나러, 이야기하러 온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또 들으란 말인가?
사람들은 ‘유인물 홈페이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는 ‘유인물형 홈페이지’를 버리고 ‘광장형 홈페이지’로 바꿔나가야 한다. (물론 모든 단체가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단체의
성격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까)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고, 남의 이야기를 듣고, 토론하고, 싸우고, 분노하고, 감동해서 참여하는, 자발성이
분출되는 廣場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시민단체가 제공해주는 ‘광장’이 오마이뉴스나 다음카페가 제공해주는 광장과
어떤
차이를 가질 수 있을까? 오마이뉴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디지털 네트워크라는 개념을 언론영역에 적절하게 도입했기 때문이다. 전국민의
기자화를 내건 오마이뉴스는 언론 고시를 통과한 기자가 아닌 네티즌들이 올린 글들을 과감하게 전면에 배치했다. 2002년 대선을 기점으로
오마이뉴스는 더욱 빛을 발했다.
오마이뉴스에 대한
애증(?)
오마이뉴스와 어떤 차별점을 지닐 수 있을까? 오마이뉴스가 광장으로서 가지는 한계는 무엇일까부터 생각해보자.
사이버문화연구소의 회원인 조희제씨는 몇 년전 ‘오마이뉴스에 대한 애증(?)’이라는 글에서 두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오마이뉴스의 기사 카테고리는 일간신문의 면구성과 너무 똑같고 정치문제에 너무 민감하다는 사실이다.
조희제씨는 오마이뉴스의 시간은 종종 80년대에 머물러있다는 느낌을 받는단다. 맞는 말이다. 오마이뉴스가 탄생한 시점부터는 정치적 변화의 폭이
가장 컸던 시기이다. 대통령선거 경선이 있었다. 그 다음에 대통령선거가 있었고,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오마이뉴스는 최고의 수준을 맞보았다.
당시에 오마이뉴스에서 정치영역을 빼면 앙꼬없는 찐빵이었다.
둘째로 조희제씨는 오마이뉴스는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에도 네트의
미시정치와 테크놀러지의 정치성, 그리고 21세기의 감수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도 맞는 말이다. 오마이뉴스는 의제를
선도하지 못하고 의제를 설명하는데 집중할 뿐이었다. 국제뉴스는 여전히 국제정치로 가득 채워져 있고, 인터넷과 경제분야에 대한 인식수준은
취약했다. (최근에는 그러한 현상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시민단체들의 오마이뉴스 따라가기가 유행인 적이 있었다.
Y타임즈나 NGO타임즈, 사이버참여연대가 그랬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시민단체들 입장에서는 오마이뉴스가 부럽고, 그 정도만 하면 대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이 추구하는 지향점이 오마이뉴스 같은 “뉴스의 광장”일 필요는 없다. 결국에 끝까지 인터넷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래서는 안된다. 그것은 오마이뉴스나 다른 비슷한 인터넷언론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5. 수평적 네트워크를 지향한다는 것
요즘들어 많은 시민단체들이 수평적 네트워크를 지향한다고 한다. 아니 다들 수평적 네트워크를 지향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수평적 네트워크는
자전거창살조직이라고 표현되기도 하고(민주노총 최세진씨), 분산형 네트워크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민경배 경희사이버대 교수)
자전거창살조직이란 가느다란 창살로 연결된 바퀴처럼 각자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느슨한
연대의 틀로 모여서 공동행동을 함께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최세진), 분산형 네트워크는 조직적인 멤버십을 갖지 않고 흩어져있는 다수의
개인들의 네트워크를 말한다. 분산형 네트워크 운동에는 핵심 주체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래서 참여자들의 관계는 지극히 수평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누구든지 운동의 방향이나 구체적인 전략 프로그램을 제시할 수 있으며, 이것이 다른 참여자들에게 설득력을 얻게 되면 그러한 방식으로 운동이
흘러가는 비정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민경배)
수평적 네트워크는 多대多
커뮤니케이션에 근거를 둔다.
맞다. 수평적 네트워크는 대세이자,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이다. 단지 인터넷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전근대에서 근대로, 다시금 근대에서 탈근대로 우리는 이동 중이다. 탈근대는 국가가 중심이, 중앙이 중심이 되는 시대가
아니다. 바로 독립적인 개인들의 수평적인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사회가 진정한 탈근대의 사회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수평적
네트워크의 가치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흔히 커뮤니티의 가치를 이야기할 때 네트워크 가치가 언급된다. 계량적으로 1對多 커뮤니케이션에서는
多만큼의 가치가 생긴다. 그리고 1對1커뮤니케이션에서는 1과 1로 오고가는 과정만큼의 가치를 생긴다. 마지막으로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多對多커뮤니케이션에서는 그로부터 얻어지는 가치가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되기 때문에 별다른 노력없이도 수십배의 가치를 얻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개인들은 자신의 가치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네트워크 안에 또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고, 그 사람과 맺는 관계만큼 가치는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 개인들이 얻게 되는 가치는 곧 네트워크의 가치로 직결된다. 개인의 가치와 네트워크의 가치가 서로 대립되지 않고 상호 보완적일 때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얻어야 할 네트워크의 가치이다.
시민단체들이 말해온 말해온 네트워크의 “현실적인 모습”은 多對多
커뮤니케이션에 근거한 네트워크가 아니라 사실상 1對多 커뮤니테이션에 기반한 네트워크였다. 이런 네트워크 방식은 그림만 다를 뿐 그 가치면에서는
중앙집중형 구조와 크게 차이가 없다. 단지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없을 뿐이다. 수평적 네트워크란 바로 多對多 커뮤니테이션을 기본으로 하는
네트워크여야 한다. 그곳에는 여러개의 중심영역 – 이것은 허브 혹은 노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 만 존재할 뿐이다.
수평적 네트워크에서의 상근운동가의 역할
인터넷에서 수평적 네트워크를
지향한다면 우리는 두가지 지점을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하나는 수평적 네트워크라는 그 공간 속에서 상근운동가의 역할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가이다. 상하관계를 나타내는 직급이 인터넷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음은 모두 알 것이다.
네트워크 공간에서 발생하는 일들의 조정과
지원의 역할은 필요하지만 그것 또한 자발성에 근거할 때 대중의 호응을 받을 수 있다. 네트워크 공간에서 상근운동가들은 오프라인에서와 똑같이
팀장, 조직가, 정책전문가, 실무자여야 하는가? 아니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 공간에서 굳이 그런 직책과 역할들로밖에
자신들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일까?
2002년 대통령 선거기간 동안 노무현 공식 홈페이지를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노무현 지지자들의
커뮤니티 속에 존재했던 송영길 의원, 추미애 의원, 김현미 부대변인을 기억할 것이다. 송영길 의원과 추미애 의원은 노무현을 대통령을 만들기 위한
자신들의 활동기록과 의견들을 커뮤니티 게시판 속에 그대로 드러냈다. 그 글을 보좌관이 써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중요한 것은 국회의원의
글이 관리자에 의해 메인화면에 노출된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 게시판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면서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김현미
부대변인도 마찬가지다. 논평을 발표하는 것과 별도로 부대변인은 노무현 후보 유세현장의 분위기를 한명의 노무현 지지자 일원으로서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그들의 글은 금방 조회수 수백, 수천을 기록했고, 여러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이들은 당시의 자신들의 소통 노력을 잊어버리고 어느새 노쇄한 정치인이 되어버렸다. 불과
4년만에. 참 변신의 귀재들이다.)
촛불시위 제안자 ‘앙마‘의 경우는 또 어떤가? 그 제안을 범대위에서 했다면 그렇게
호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 시민단체에서 제안했어도 호응받지 못했을 것이다. 한명의 네티즌으로서의 앙마가 제안하고 여러명의 네티즌들이
자발적으로 게시물을 퍼다 날랐던 것 뿐이다.
한명의 열정적인 네티즌으로 무장하자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수평적 네트워크를 지향한다고 하면 상근운동가는 더이상 잡지편집자가 되려고 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굳이
집회 단상만 고집해서도 안된다. 그들을 굳이 “지도”한다는 생각도 가지지 않는게 좋다. 그게 통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좀더 열성적이고,
의견표명에 적극적인 한명의 네티즌으로 자신을 무장할 필요가 있다.
역시 호흡과 소통이 중요하다. 이대로 가면 시민운동가가 설
자리가 마땅치 않을 것이다. 사회적 의제를 선도하고, 새로운 문제를 찾아내서 해결하는데 시간을 바치기보다는 세상이 바뀌어지는 모습들을 뒤늦게
평론하는 사람들로 전락할 것임이 틀림없다. 1년, 2년 세다보면 어느새 10년이 흘러가버리듯이 변화의 현상들을 보고만 있으면 어느 순간 이미
세상이 바뀌어버린걸 알게 될 것이다.
마치 노회한 정치인 김종필씨가 지나고 보니 세상이 이미 바뀌었다고 말하면서 정치권을
떠났듯이. 모든 이슈들은 개개인의 시민들에게 넘겨주게 되어 있다. 이미 상당부분 넘어가고 있다. (이 노쇄한 정치인이 2007년 대선을 또 장식했다. 정치 권력에 대한 욕심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렬한 유혹인가 보다)
수경스님의 삼보일배, 지율스님의 목숨을 건 단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분들이 종교인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지 우리같은 사람이 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광고
강의석군은 종교예배선택권이라는 새로운 의제를 혼자서 제기했다.
100여일 동안 투쟁하고, 40여일 동안 단식했다. 그는 “단식은
가장 평화적인 신념 표출 방식”이라고 해서 우리를 숙연하게 했다. 그 전에 오태양씨는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을 우리 사회의 화두로 만들었다.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몸으로 스스로 실천해서 보여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것이 사회적 이슈로 가능해진 것은 역시
인터넷이라는 매체의 영향력 때문이다. 선전 선동하는 시대에서 호흡하고 소통하는 시대가 오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6. 조직틀을 깨고 운동의 영역으로
홈페이지 개편전략에서 이게 핵심이다. “조직을 넘어서”
홈페이지를
우리 조직의 내용들로만 가득 채워놓을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도대체 누구인가? 앞서 이야기한 광장형 홈페이지는 그런 모습이 아니다. 조직의
이름에 국한해서 홈페이지 전략을 짰을 때 여전히 우리는 부족한 방문자수에 실망하고 서로 호흡하고 소통할 네티즌들이 홈페이지 안에 존재하지 않음에
절망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쇼핑몰 중의 하나인 아마존은 단순히 서적만을 판매하는 곳은 아니다. 아마존은 서적, 음반,
장남감, 오락과 같은 분야에서 여전히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아마존의 슬로건은 “고객이 원하는 모든 것을 여기에서(On the Shelf)”다. 이 관점을
기본으로 서적에서 출발해 장난감, CD 등으로 영역을 확장해왔다.
혹자는 이를 문어발식 확장이라고도 한다. 좋게 말하면 수평적
확장형 비즈니스 모델이라고도 한다. 국내의 대표적인 인터넷서점인 YES24, 알라딘에서 꼭 책만 팔지는 않는다. 책만 팔아가지고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DVD, 소프트웨어, 가전제품 등으로 영역을
확대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한가지 이슈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단체를 지향한다면 굳이 조직을 넘어서라는 웹전략을 짤
이유는 없다. 하지만 비록 우리가 지금 그 분야의 운동을 집중하고 있더라도 우리의 지향점이 그 분야를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이라면 우리는
“운동”이라는 큰 관점으로부터 출발하는게 옳다.
자신의 영역이 분명한 운동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환경운동이 환경단체만의 몫이
아니듯, 예산감시운동도 예산감시단체만의 몫이 더 이상 아니다. 운동은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세분화되거나 서로 모아질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에 관심을 가지고, 미래에 그러한 가치를 궁극적으로 실현할 사람들은 참여연대에도 있고, 서프라이즈에도 있고,
오마이뉴스에도 있고, 조선일보에도 있다. 지금 당장은 조직이라는 테두리 안에만 존재하겠지만 잠재적 수용자는 세상에 고루 퍼져있다.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 영역을 최대한 확장하고, 그 안에서 그들의 가치와 경쟁하고, 싸워야 한다. 그래야 인터넷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